남대문 신세계백화점 본점 수유실. 사진 = 서자빈평일 오전 백화점은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로 가득합니다.
이유는 대부분 ‘백화점 말고는 아기를 데리고 마음 편히 갈 곳이 없어서’입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엄마는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지 않습니다. 아기들을 위한 문화센터 활동, 식사, 장보기, 친구와의 만남 등의 다른 이유로 백화점에 갑니다.
그 외에도 백화점이 엄마로서 가장 마음이 편한 곳인 이유는 모유 수유와 젖병 수유 등을 위한 깔끔하고 훌륭한 수유실과 기저귀를 편하고 위생적으로 갈 수 있는 가족화장실 때문입니다. 즉
백화점이 제공하는 환경이 엄마와 아기에게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와 엄마들이 너무 다니기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백화점밖에 갈 곳이 없나? 다른 곳은?’라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죠.
미국에서 생활 중인 사촌은 근 2년간 육아를 하며 한 번도 ‘기저귀는 어디서 갈지? 수유는 어디서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갖고 외출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젖병 수유는 어디에서나 쉬웠고(젖병과 분유 등을 잘 준비해왔다는 가정하에), 모유 수유 또한 따로 수유실을 찾아 헤멜 필요가 없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모유 수유를 하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렵지 않게 배고픈 아기를 먹일 수 있었죠. 편한 소파가 놓여있지만 괜히 아빠는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수유실이 없어도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어디에서라도 편히 배고픈 아기의 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엄마들이 마음 놓고 어디든 외출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존재합니다. 바로
‘어디에나 있는 Changing Table’, 즉 기저귀 갈이대입니다.
규모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식당, 카페, 심지어는 주유소, 슈퍼는 물론, 대학교에도 화장실마다 간이 기저귀 갈이대가 설치되어 있죠. 한국 같으면 ‘무슨 아기를 데리고 술을 먹으러 오냐’는 핀잔을 들을 법한 펍, 와인바에도 있습니다.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 배치된 Changing Table. Colorado State University News 캡처정말
육아 친화적입니다. 한국의 백화점 내 최상급 시설의 체인징 룸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디를 가더라도 기저귀를 처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화장실이 남녀 나누어져 있는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남자 화장실에도 대부분 설치되어 있습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벽 한 면에 설치되어 있는 플라스틱 판때기가 전부입니다. ‘에이 뭐야. 이거 가지고 생색이야?’ 할 수도 있을 단순한 판때기죠.
그렇지만
이 판때기를 거의 모든 화장실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기저귀를 어디서 갈아야 할지 난감해하며 아기를 둘러멘 채로 적당한 곳을 찾아 헤매고, 1분 1초도 가만있지 않는 아기를 안고 달래며 화장실 한 공간에서 눈치 보며 기저귀를 갈아본 경험이 있는 엄마 아빠라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더욱 공감할 수 있겠죠.
서울역 2층 남자화장실에 설치된 기저귀 교환대. 중앙일보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 광주시 22억 들여 만드는 까닭' 기사 내 이미지 캡처투박한 기저귀 갈이대. 필자는 이 기저귀 갈이대가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정말 따뜻하고 섬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에나 있는 판때기 하나가, 아기를 키우는 부모들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외출하며 본인들의 육아 외 일상도 즐길 수 있게 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민폐를 끼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미국도 몇 년 전 #squatforchange라는 캠페인이 육아 대디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갈이대가 없어, 스쿼트 자세로 아기를 다리 위에 두고 고군분투하며 기저귀를 가는 육아 대디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SNS에 해당 태그와 함께 업로드했던 것이죠.
실제로 이 챌린지는 미국 곳곳에 남자화장실에도 기저귀 갈이대를 설치하는 변화가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시각 메시지가 주는 울림과 바람이 컸던 것이죠.
#squatforchange 챌린지 이미지. '미국 뉴욕주, 공공 남자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 의무화' 티스토리 캡처우리나라도 현재 정부가 관리하는 건물이나 지하철, 공항 등에는 이러한 플라스틱 접이식 기저귀 갈이대가 많이 설치되어 있지만
일상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더불어 위생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화장실도 많아, 면역력이 약한 영유아들에게 취약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죠.
'변기보다 16배 더럽다… 지하철 화장실 내 기저귀 교환대 위생상태 ‘엉망’ 기사 내 이미지. 조선비즈 캡처
사실 한국에도 필요한 것은, 세련된 감성 인테리어와 값비싼 육아용품이 구비된 수유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화장실 한편에 마련된 플라스틱 접이식 판때기 하나 정도이지 않을까요?
‘당연한 인프라’가 먼저입니다.
인프라라고 해서 화려한 것이 아니고, 그저 판때기 하나면 충분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화장실에 플라스틱 판때기 하나는 당연히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먼저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정도면 더욱 좋고요.
엄마 아빠가 아닌 일반인들도 화장실 한 벽에 붙어있는 판때기 정도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각박한 사회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아기와 함께할 수 있는 일상 속의 최소한 환경, 어쩌면 육아 문제 해결을 위한 또 다른 단추이지 않을까요? 엄마 아빠들이 백화점만 가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사회가 되길 기대합니다.